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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과 토마스 제퍼슨, 말과 글로 백성의 마음을 읽으려 했던 지도자

동대문포스트 dongdaemunpost 2011. 10. 17. 14:01

노영찬 교수(미국 조지메이슨대학교)

 

지금 한국은 한반도의 한국을 넘어 세계를 향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걸 맞는 새로운 비전, 새로운 지도자의 리더십이 절실해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종대왕은 앞으로 전개될 ‘새 한국(New Korea)', '세계적 한국(Global Korea)’을 건설하는데 결정적인 정신적 지주가 되리라 믿는다. 세종을 과거의 훌륭한 왕, 지도자로 기념하기보다는 새롭게 해석하고 재조명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미국에는 건국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조지 워싱턴(1732-1799년)이나 토마스 제퍼슨(1743-1826년) 대통령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Founding Fathers)로 추앙받는다. 이들의 건국정신은 미국이 국가적 위기를 당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 할 때, 또 새로운 도약을 위해 정신적 고무를 받으려 할 때 반드시 등장하여, 국민에게 앞으로 갈 길을 제시한다. 미국은 항상 과거의 건국정신으로 돌아가 자기들의 정체성을 다시 정리함으로써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존경하는 지도자 찾기 어려워>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러한 국부나 건국정신에 대한 사상이 부족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단군(檀君)의 ‘홍익정신(弘益精神) 정신이 있으나 근세에 들어 지도자로서의 이상적인 상(象)은 없다. 불행한 일이다. 한국은 미국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국민이 모두 존경하는 국부, 국민 전체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건국이념이나 정신이 깃든 지도자상은 찾기가 어렵다.

 

세종은 분명히 우리 민족이 찾아갈 과거의 지평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여 과거를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데 아직 미흡하다. 세종은 분명히 우리 민족의 염원과 규범을 제시해주는 의미 있는 과거의 ‘레퍼런스 포인트(reference point)'이다. 우리는 세종을 세계화해야 한다. 세종의 이상과 꿈, 그리고 세종이 가졌던 국가관, 민족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열어주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새 한국” 혹은 “세계적 한국”을 건설하는 정신적 토대이다.

 

우리는 세종을 14세기 조선시대의 왕에서 해방시켜 21세기 한국의 세계화에 새로운 지평을 제공해주는 지도자로 바꾸어 해석해야 할 때가 왔다. 물론 세종대왕은 세세토록 우리 민족이 떠받들 인물이지만, 한국이 위기를 당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위해 도약할 때, 한국의 지도자나 국민이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용기와 지혜를 찾는 보고가 되어야 한다. 또한, 세종의 지도력에 비추어 한국이 가려고 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종과 오늘의 미국을 만든 토마스 제퍼슨과 비교하는 일은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첫째로 세종과 토마스 제퍼슨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믿었다. 제퍼슨은 인간은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적 인권이 있다고 믿었다. 즉 삶에 대한 권리, 자유에 대한 권리,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그것이다. 물론 인간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사상은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 존 로크의 영향을 받았지만,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은 이러한 시대적인 영향, 특히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 미국의 개국 이념이 되었다. 한편, 세종대왕이 살았던 시대는 유교문화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세종은 유교의 이념으로 조선을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던 임금이었다. 유교 이념은 근본적으로 인본주의이며 덕치주의(德治主義)였다. 덕치주의란 지도자가 무력으로 국민을 지배하려는 패도(覇道)가 아니라 덕의 감화로 이끌어가는 왕도(王道)정치이다. 세종의 통치사상은 철저히 왕도에 입각한 민본 정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유교의 인본주의는 서구 계몽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세종은 유교의 인본주의와 민본주의를 조선에서 마음껏 펼쳐보려고 노력했던 이상적 통치자였다. 세종은 이 유교가 가진 왕도(王道)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인본주의나 계몽사상은 모두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존엄성과 권리를 인정하고 인간이 가진 능력을 일깨우고 개발하여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는 개인과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다. 이런 점에서 세종은 통치자로서 백성에 대한 깊은 배려가 항상 있었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했다.

 

<표현의 자유와 권리 인정>

둘째로 한국 창제는 바로 일한 세종의 인본주의 정신에 따라 이루어졌다. 백성에 대한 연민으로 출발했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발로였다. 훈민정음(訓民正音)에서 밝혔듯이 세종이 한글을 만든 동기는 무엇보다도 백성이 자기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한글 창제는 세종에게 있어 기본적 인권의 문제였다. 인간이 읽고 쓰지 못하면 언론의 자유가 없어진다. 14세기 조선을 상상해볼 때 사실 당시의 정치는 배운 사람들, 양반계급, 엘리트들에 의한 정치였다. 그 때문에 이러한 계급들이 상용하는 한문으로 얼마든지 의사 통용이 가능했고 국가의 행정을 처리하거나 관리를 채용하고 학문을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구태여 한글 같은 또 하나의 글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세종은 백성의 표현 자유와 권리를 인정했다. 놀라운 사실이다. 이것은 유교의 정신 가운데 깊이 자리하는 유교적 인본주의(Confucian Humanism)에 입각한 사상이었다.

 

유교에서 ‘학(學)’이라는 개념은 단지 학자들이 관리가 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이 아니었다. 원래 ‘배움[學]’은 통치자로부터 피지배자인 백성에까지 그리고 개인에서 가족, 국가, 세계에 이르는 보편적인 삶의 길이었다. 이렇게 보면 세종은 유교가 말하는 ‘학’의 개념을 누구보다도 더 정확히 파악한 왕이었다. 또 세종은 임금과 신하, 관료와 학자, 양방의 말이 아니라 ‘백성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유교적 전통에서는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백성의 마음’은 ‘백성의 말’ 속에 있고, ‘마음’은 ‘말’로 표현되고 ‘글’로 전달된다. 세종은 백성이 자유롭게 자기들의 마음을 말뿐 아니라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이러한 백성의 말과 글을 통해서 ‘하늘의 마음’을 읽으려고 했다.

 

한편, 토머스 제퍼슨 역시 국민이 알아야 할 권리를 인정했다. 그는 모든 국민이 글을 읽을 때 올바른 의미에서 국민이 자기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점에서 세종과 놀랍게도 비슷하다. 다시 말해 글을 읽는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고 백성의 마음을 하늘의 마음으로 알고 다스리는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셋째로, 세종과 토마스 제퍼슨은 모두 과학정신의 소유자였다. 세종은 천문학이나 측우기, 물시계 등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제퍼슨은 계몽사상의 후계자로 인문사회 분야뿐 아니라 자연과학에도 특별한 관심을 뒀고, 과학도로 자처하면서 과학적 발명도 시도했다. 버지니아 샬롯스빌(Charlottesville)에 있는 토마스 제퍼슨의 생가는 그 자신이 설계하고 지은 집이며 그 집에 들어가면 그의 발명품들을 볼 수 있다. 또 세종이 농업과 양잠에 관심을 두고 장려했듯이 토마스 제퍼슨도 농업에 관심을 뒀고 그의 집도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넷째로, 세종과 제퍼슨 모두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세종은 학문을 좋아했고 집현전을 만들어 학문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토마스 제퍼슨 역시 고등교육을 장려하고 이러한 교육이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가능하도록 공공 교육기관을 세웠다. 미국의 주립대학교 중에 가장 우수한 학교에 속하는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는 제퍼슨이 세운 학교이다.

 

<한국 세계화의 정신적 지표>

마지막으로 제퍼슨의 큰 공로 가운데 하나는 교회와 국가(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킨 것이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보호함과 동시에 국가가 공식적으로 어떤 특정한 종교를 인정해서 국교로 삼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도 막았다. 이러한 정책을 토대로 미국은 오늘까지도 미국 헌법상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고 있다. 세종도 국가의 공식 이념은 유교였지만 말년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다시 살려냈다. 세종 역시 국가의 이념과 개인의 종교성을 분리시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주고 종교로서의 불교를 인정했다. 토마스 제퍼슨의 정교분리 정책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종은 제퍼슨과 달리 조선조의 왕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세종은 제퍼슨보다 3,4세기 앞서 있고 유교를 공식이념으로 삼았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제퍼슨과 같은 ‘민주적’인 사고와 제도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종은 분명히 인본주의 또는 민본주의에 따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였고 덕치주의를 실현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조선은 민주국가는 아니었다. ‘국민을 위하는 정부’의 이상은 가지고 있었지만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의 정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이다. 세종은 그러한 한계 안에서도 왕권(王權)과 신권(神權)을 분리하면서 조화시켰고, 제도적으로 권력의 안정을 기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토마스 제퍼슨과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의 지도정신과 가치관, 그의 민본사상과 과학주의 그리고 한글창제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한 것은 다시금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세종의 정신은 한국이 세계화하는데 커다란 정신적인 기틀을 마련해 줄 것이다.

 

(이 글은 10월 10일 제3회 세종학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노영찬 교수(미국 조지메이슨대)의 논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