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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용 동대문구상이군경회장, '청백리의 고장 동대문구'

동대문포스트 dongdaemunpost 2017. 10. 26. 09:37



청백리의 고장 동대문구

 

 

황 진 용 동대문구 지회장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서울특별시지부

 

청백리란 뜻은 한마디로 깨끗한 관리, 요즈음 말로 바꾸면 부정부패와 거리가 먼 정직한 성품의 모범 공무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동대문구에는 서울시 최초로 6.25 전쟁과 베트남(월남) 전쟁에 참전한 동대문구 출신 4,500여명의 참전 명비가 건립되었다.

 

필자가 상이군경 동대문구 지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국가보훈처로부터 6.25 역사와 월남참전 역사, 참전명비, 안내문을 서술하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수차례 거절 하였으나 참전명비 건립 초기부터 참여한 여러 가지 내용을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선배 동료들의 의견을 듣고 각종 역사적인 자료를 수집하여 6.25 역사와 월남참전 역사를 비석에 새길 수 있었다.

 

아울러 참전명비 안내문은 동대문구 특성에 맞게 각종 자료를 수집하던 중 동대문구가 과거 청백리의 고장이었다는 자랑스러운 내용을 알게 되었다.

 

조선왕조 선비 중 청백리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하정 유관선생 댁이 지금의 신설동 근처에 있었다. 하정 유관 선생은 문화 유씨 명문가 출신인 고려 중기 문신 유공권의 후예이며 그 증조부 또한 좌우 위상장군 유성비였으니 문무(文武)를 겸한 명문가였다.

 

하정 유관공은 고려 말 충목왕(재위 1337-1348) 때 태어나 공민왕 20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모나지 않고 둥근 성격과 공정한 처사로 동료관원들은 물론 많은 백성들로 부터 추앙을 받았다. 1329년 조선이 개국되어 병조 이랑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세종 9년 그가 81세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 까지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네 임금을 모시고 성균관 대사성, 강원도, 전라도 관찰사(현직, 도지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한 점 부끄럼 없는 행동이며 생활 태도가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으며 국왕이하 모든 관민이 그를 국노(國老)로 받들고 존경하였다. 그가 88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께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던 자리를 즉시 파하고 흰옷을 갈아입고 홍화문 밖으로 나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유관공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도식을 행했다고 왕조신록에 기록되어있다.

 

세종대왕께서 친히 지으신 제문(祭文)을 보면 공께서 문 앞에 사사로운 정을 거절하고 고방에는 남은 물건이 없고 직위가 높았으나 부지런하고 검소한 기풍이 돋보이셨으며 덕을 높이 존중 받으면서도 교만 하거나 인색한 태도가 없어 과연 모든 선비에게 모범을 보이셨다고 나와 있다.

 

하정 유관공은 성품이 워낙 청렴결백하여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멀고 재물을 탐내지 않다보니 그가 가진 재산이 단 방두칸짜리 초가집 뿐 이였고 수중에 있는 돈이란 나라에서 주는 급료 뿐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웃과 친척들을 돌봐 주다보니 늘 궁색했고 그를 찾아와 수시로 청하는 이들에게 박정하게 대하지 않고 조금씩 나눠 주다보니 항상 가난을 면할 수 없었다.

 

남의 문중에 사당을 짓겠다고 찾아와도 도와주고 마을에 다리나 서당을 짓겠다고 도움을 청하면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되고 초석이 될 인재를 기르는 일인데 교육자라 자처 하는 내가 어찌 인색 하리요 하며 돈을 나누어 주다보니 그의 살림은 항상 쪼들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사람 좋기로 소문난 선생의 부인 또한 궁색한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느 여름 장맛비가 계속 쏟아지는 날 이였다 낡은 초가집이라 장대같이 내리는 장맛비에 그만 지붕이 새기 시작하였다. 매년 추수가 끝난 가을이면 새 볏짚으로 지붕을 얹었지만 그렇게 하려면 볏짚도 사야하고 지붕을 잇는 일꾼들의 품삯도 줘야하니 검소하기 그지없는 선생으로서 그것마저도 낭비라 생각하고 새 지붕을 얹지 않은 탓이었다.

이방 저방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처음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세수 그릇을 갖다놓고 빗물을 받아 냈지만 며칠씩 쏟아지는 장맛비라 이곳저곳 빗물이 새니 속수무책 이였다.

 

그러자 공은 부인, 어서 가서 우산을 가지고 오도록 하시오 우리 두 사람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해 보도록 합시다라고 하였다. 부인으로서는 심란하기 짝이 없었지만 대감께서 시키는 대로 우산을 가져와 두 내외가 방안에서 비를 피했다.

 

우리는 그나마 다행이지 않소. 우리에겐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이라도 준비되어 있으니 말이요 다행히 우리 집엔 우산이라도 있지만 이 장맛비에 우산마저도 없는 백성들이 집에 비가 새면 어찌하나 그게 걱정이 구려라고 그는 말했다. 이 일화에서 백성들의 살림을 걱정하는 공의 애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에 하정 유관선생의 외손(6대손)으로서 조선시대 실학파의 선구자인 지봉(芝峰) 이수광(李睡光)은 공이 거주하던 집터에 하정선생을 기리는 정자를 지은 다음 비우당(庇雨當)이라는 현판을 달아 공의 덕과 인품을 후세에 전하였다.

 

동대문 밖 변두리인 신설동 지역을 (우산각)골이라 불렀으며 하정공의 근면한 절약정신은 관복 소매 끝이 다 헤진 옷을 꿰매 입으시고 업무에 정진 하셨으며 평소 짚신을 즐겨 신으시고 다 닳아진 짚신마저도 버리지 않고 물에 적셔 땅에 묻고 그 위에 호박을 심었다하여 짚신대감이란 별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선비들은 개인의 인격과 문학적 소양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린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을 마음에 새겼다. 서울 사대문 안에는 세종로, 을지로, 충무로, 퇴계로 등 우리 역사에 빛나는 위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기억하자는 뜻으로 도로명으로 정해져 있다. 동대문구에는 조선시대 대표적 청백리의 표상인 하정 유관선생의 호를 딴 하정로가 있다. 하지만 많은 구민들이 청백리의 고장 동대문구를 알고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아쉽고 아쉽다.

 

동대문구에는 신설동에서 동대문구청까지 도로명이 하정로라고 명명한 것 또한 하정공의 정신을 보존함이요, 청백리의 고장이란 칭호 또한 공의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현직 구청장이신 유덕열구청장 또한 유관공의 직계 16대 후손이란 것도 알게 되어 더욱 믿음이 간다. 37만 동대문 구민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시고 지방자치 단체장으로서 진정한 목민관으로서 선대의 유지를 받들어 더더욱 구정업무에 정진(正進)하시길 기대해본다.